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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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정답이 없다. 고정불변이 아니라는 얘기다.
모든 것이 고정불변이 아닌데 시가 어떻게 고정불변이겠 는가?
나는 늘 시를 새롭게 쓰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위험 이 따른다.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비난받을 수도 있다. 그래도 계속 도전하고 싶다.
새로움에 대한 도전은 예술가의 운명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으로 살며, 첨단을 향해 철저히 외로워 지고자 한다.
좋은 시란 어떤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시일 것이다.
한두 사람이 좋아하는 시가 좋은 시일 수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좋은 시란 없 는 것이다.
나는 이번 시집(여섯 번째)에 ‘새로운 시’(전위시, 실험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몇 편 실었다. 앞으로 더 많은 ‘새로운 시’를 쓰고 싶다. 그래서 말미에 전위시에 대한 글을 한 편 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고 싶다.
도움을 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2020년 봄, 금련산 자락에서
강준철
차례
작 가 마 을 시 인 선
40
005 • 시인의 말
제1부
013 • 벚나무 지옥
014 • 봄 13
016 • 결코 슬픈 손을 흔들지 말자
018 • 봄의 멜로디
020 • 꽃 5
022 • 벽 속의 귀뚜라미
024 • 눈雪 2
026 • 가을 9
027 • 산복도로
028 • 하산下山
030 • 혼밥
032 • 풍선
033 • 땅끝마을 할매
034 • 사랑 2
035 • 산 접동새를 찾아서
036 • 새
037 • 쌀
038 • 단시 실험
040 • 단시 여행 5수
042 • 랩식式 - 방탄소년단 BTS
043 • 역설
048 • 연작 시조
제2부
053 • 죽는다는 건
054 • 겁외사劫外寺
056 • 구별하면 지옥 간다
058 • 불의 집
060 • 상징의 숲
062 • 열반
064 • 순례
066 • 중도中道
068 • 견성성불見性成佛
069 • 탑을 쌓으며
070 • 굼벙이의 날개
071 • 기호
072 • 눈眼
074 • 꽃 3
075 • 숲에서
076 • 절대 자유
078 • 노래는 강물처럼 출렁이고
080 • 인생은
082 • 잠언시
083 • 셈본
084 • 매미 3
085 • 박쥐
제3부
089 • 수족관
090 • 목숨 3
092 • 거미와 민달팽이와 나
094 • 씀바귀
096 • 바다를 자르는 여자
097 • 사랑 4
098 • 무
100 • 아그배
102 • 달아, 안녕?
104 • 새는 슬픈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106 • 페루
107 • 악어백
110 • 소리 6
제4부
113 • 땅이 역사다
114 • 장마 7
115 • 안데스의 콘도로여
116 • 장막
117• 달은 산을 넘고
118• 매미들의 항변
120 • 보안사保安司
122 • 포스트 예술
124 • 입소문
125• 행복한 해일
126 • 횡설수설
128 • 대한민국
130 • 에스컬레이터 사랑
133 • 나의 시론 - ‘새로운 시’의 도래를 위하여 / 강준철
‘새로운 시’의 도래를 위하여
강준철
들머리
한국시는 현재 시의 종류별로는 주정시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고, 문예사조상으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적 경향이 주류다. 그리고 사회적 리얼 리즘과 낭만주의(이상주의) 혹은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이 대립되어 있으며, 문단은 좌파와 우파로 분열되어 있다.
이러한 흐름은 근대 이후 계속되어 온 것으로 근 100년 가까 이 변화가 없다. 주지시나 주의시는 없고, 서사시나 극시도 거 의 없으며, 장시도 없다. 한마디로 다양성이 없다. 한 세기가 지났는데도, 세상이 그렇게 빨리 많이도 변했는데도 문학 특히 시가 변화가 없다는 것은 이상하다.
필자는 이 시점에서 우리 시에 어떤 면으로든지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새로운 시(장르)를 창조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 본고에서 ‘새로운 시’라는 용어는 전위시前衛詩, 아방가르드, abant- garde 또는 실험시와 같은 뜻으로 쓰고자 한다. 한국의 전위시 어디까지 왔나? 먼저 전위의 개념부터 알아보자.
<전위>라는 말은 전투적(도전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당대의 예술을 앞지르고 있다, 소수에 의해 수행된다는 의미도 있다. 새로운 도전을 추구하는 혁명적, 파격적 예술이다. 전위시는 당대의 시적 규범이나 그때까지의 시적 전통을 무섭게 파괴하 면서 당대보다 앞서가려는 의식으로 지탱된다.(이승훈, 『포스트모더
니즘 시론』, 세계사, 1997, 137쪽)
실험시는 정상적인 문법·통사·의미론을 파괴한다. 이러한 노력은 어느 시대에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존재해 왔다. 즉 아방가르드 예술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전위는 새로움의 추구다. 지금까지 시의 역사는 전위의 역사 였다. 그것은 언제나 있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전위시는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내용적 전위 이고 다른 하나는 형식적 전위이다. 내용적 전위를 이승훈은 도덕주의적 측면이라고 하는데 필자가 보기엔 도덕적이라기보다 사상, 정서 등의 변혁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를테면 사회적 리얼리즘에서 현실에 대한 인식을 더 깊게 파악한다든지 다르 게 해석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형식적 전위는 미적 전위로 시 의 형식이나 표현을 변혁하는 것이다.
<전위>라는 말은 군대의 첨병과 같은 말이다. 첨병의 임무는 적정의 탐색이다. 현 시대 한국의 시에서 적은 누구인가? 그것 은 한국의 현대시가 된다. 따라서 한국 현대시의 양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승리가 보장된다.
여기서는 서론에서 살펴 본 것 중에서 서정시(주정시)와 모더 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살펴 볼 것이다. 장르상 서정 시, 문예사조상 모더니즘의 시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포스트모 더니즘적 시가 약간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서정시는 대부분 낭만주의 시이다. 우리 신문학사를 대충 살펴보면, 1920년대 『백조』 동인들을 중심으로 낭만주의 시가 성행한 이래 1930년대 ‘시문학파’와 ‘생명파’, 1940년대의 ‘청록파’의 시들이 있었고, 이후 한국 시단에는 그들의 영향 하 에 서정시의 계보를 이어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중간에 상징 시나 주지시, 모더니즘의 시도 그 뒤를 이었지만 해방 이후까 지 주류는 청록파와 생명파로 볼 수 있다.
낭만시는 <그리움>의 시다. 본원에의 환원, 귀향 의식, 자아 와 세계가 하나가 되려는 생각,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 현실을 초월하려는 의식,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생각 등이 낭만주의적 사고다. 낭만주의는 초월주의(신비주의, 범신론), 전원주의, 원시주의와 관련된다.(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민음사, 1980. 40 - 44쪽. 참조)
여기서 우리는 왜 우리 시의 주류가 서정시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정서가 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시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정서적 구조다. 이것은 시인의 의 식이 지성적이라기보다 근본적으로 정서 의식이기 때문이다.(김준오, 『시론』, 문장, 1982, 66-67쪽).
시의 본령이 사상이 아니라 정서라면 정서를 극대화하는 시 - 극서정시를 전위적으로 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들의 시론은 엘리엇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와 같은 시론 은 현재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데 그 핵심은 폐쇄적 형식이 다. 그러나 이러한 폐쇄적 시작 태도는 다양한 시의 생산을 가 로 막는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음으로 모더니즘 시에 대하여 살펴보자.
문예사조상으로 보면 낭만주의의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사실 주의, 자연주의고 이의 반동으로 나타난 것이 모더니즘이다. 모더니즘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현대문학의 여러 경향 중 특별히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것만 이 모더니즘과 관계있다. … 19세기 사실주의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이다. 모더니즘은 유물론은 물론 일체의 물질주의와 산업 주의를 개인 정신의 부자유로 보고 반발한다. 표현주의, 이미 지즘, 엘리어트류의 고전주의, 다다이즘, 부조리 문학, 초현실주의 등이 이에 속한다.(이상섭, 앞의 책, 63-64쪽)
낭만주의의 가장 대척적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이미지즘이 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낭만주의가 중요시했던 감성과 음악 성을 지성과 회화성(심상)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지즘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고 다음에 포괄적으로 모더니즘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미지스트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흄으로부터 19세기 낭만주 의를 배격하고 고전주의적 예술관을 부활시켜야 할 필요를 배 웠고, 또한 윤곽이 뚜렷한 시를 짓는 연습도 했다. 그들은 낭만 주의의 막연한 정신편향, 센티멘털리즘에 반대하고 정밀함과 억제력을 요구하는 고전적 태도를 가지려고 하였다. 또한 이미 지에 대한 확고한 개념을 배웠다. … 현시점에서 볼 때, 이미지 즘은 19세기 영미시의 전통을 청산하고 이른바 현대시의 시대 로 넘어오는 결정적 단계로 보인다. 즉 하나의 전위적 운동이 었다.
이미지스트들은 현실생활의 모든 것을 소재로 하여, 현실감 이 있는 산 언어로 시를 쓰고자 했다. 그들은 낭만주의자들이 시정신과 영감에 의존하는 것에 대항하여, 작품을 갈고 닦는 숙련공의 태도를 가질 것을 요청하였다. 이미지즘 운동은 심상 에 대한 관심이 보편화되는 계기를 마련했고, 19세기를 청산하 는 결정적인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이미지즘의 근본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일상의 언어를 사용할 것. 그러나 반드시 정확한 말을 쓸 것. 2) 모든 습관화된 표현을 피할 것. 3) 새로운 기분을 표현 하는 새로운 리듬을 창조할 것. 4)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 완전 히 자유로울 것. 5) 하나의 심상을 제시할 것. 구체적 사실을 정 확히 보여주어야 하며, 막연한 일반론, 추상론은 배격할 것. 6) 견고하고 투명한 시를 창조할 것. 윤곽이 흐리든가 불명확한 시를 피할 것. 7) 집약, 집중을 위해 노력할 것. 그것이 시의 정 수임을 알 것. 8) 완전한 진술이나 설명보다는 간략히 암시할
것. (이상섭, 앞의 책, 230-232쪽)
이미지즘 시들의 문제점은 시의 음악성과 의미성을 제외하고 지나치게 이미지만을 강조하였으므로 완전한 미적 형식이라 할 수 없다는 점과 제작자의 태도를 취함으로써 억지로 쓰게 되어 감동이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이미지 즘 시들이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은 시론을 철저히 이해하고 실 천하였는지 의문이다. 감정의 절제와 이미지를 강조하는 시를 쓰기는 했으나 비유적 이미지나 상징적, 원형적 이미지보다 단 순한 묘사적 이미지들 위주로 시를 생산하지 않았나 한다. 이 와 같은 경향은 아직도 일부 우리 시에 남아 있어 문제가 된다. 모더니즘의 특성은 도시주의, 비인간화, 원시주의, 에로티시 즘, 반도덕적, 실험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또한 모더니즘의 시적 특성은 “초월적 현실 혹은 이상적 유토피아가 존재했다.”는 특성을 제외하면 엘리엇의 시론과 똑같은데 “차가운 형식성, 몰개성, 폐쇄적 형식, 어려운 시일수록 좋은 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엘리엇T.S. Eliot의 시관은 신비평에 막강한 영향을 주었 고, 이후 형식주의, 구조주의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가장 확고하고 완벽한 이론으로 보이던 모더니즘도 고정불변의 시론이 아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한 것이 다. 아래에서 모더니즘 시와 포스트모더니즘 시(특히 고백파, 투사파 의 시)를 비교해 보자.
전자는 엄격한 형식을 고수하려는 문학 이론이고 후자는 그 것을 해체하여 형식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이론이다. 전자는 언 술의 자발성을 극도로 억제한다. 신비평의 시적 원리는 인위적 형식성과 압축된 형식성을 강조하는데 이에 비해 후자는 이것 을 창조 과정의 자발성을 규제하는 행위로 본다. 시를 쓰는 것 은 삶을 좀 더 자유롭게 실현하기 위한 것이므로 형식에 의해 억압된 삶의 본능적 흐름을 그대로 투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모더니즘은 몰개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시인과 시적 화자는 단절되어야 한다고 한다. 시는 언어로 조직된 특수한 세계이므로 시적 화자는 시인의 개성(시인의 감정, 목소리)이 소멸할 때 가능하다고 본다.(T. S. 엘리엇).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시인의 목소리를 강조한다. 목소리는 자전적 요소를 내포하며, 도덕적 으로 은폐되어야 할 개인적인 무의식의 세계마저 드러낸다. 또 한 전자는 삶의 곤경, 무질서를 표현하면서도 초월의 세계, 신화의 세계를 지향했는데 비해 후자는 일상적 정서와 경험을 소 재로 삼으며, 고백파의 경우 그것은 밝고 건강한 것이라기보다 억압되고 비참한 것이다. 전자가 이성, 질서, 의식이 인간성이 라고 보는데 비해 후자는 본능, 충동, 무의식이 인간의 본성(자 연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전자가 휴머니즘적 태도라면 후자는 반휴머니즘적 태도라 할 수 있다. 또한 전자는 폐쇄적 형식 - 형식의 완결성 즉 내적 유기성, 통일성(구조성), 수미일관성을 강 조한다. 한마디로 구성을 중시하는데 비해 후자는 개방성 즉 탈구성(해체)을 강조한다. 인위적 세련성보다 자발적 직접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모더니즘의 단점을 지적하면, 첫째, 비인간화는 시를 너무 딱딱하게 만들고, 문학이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 것인데 인간의 삶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수 있고, 에로티시즘, 반도 덕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일면만을 본 것으로 인간 전 체를 본 것이 아니다. 둘째, 폐쇄적 형식성은 시의 자유로운 발 전을 저해한다. 아류 양산의 가능성도 있다. 셋째, 내용보다 형 식에 치우쳐 있다. 넷째, 난해성은 소통부재로 독자 감소를 가 져와 문학의 존립성마저 흔들 수 있다.
다음, 포스트모더니즘의 단점으로는 첫째, 본능, 충동, 무의 식을 인간의 본성으로 본 것은 인간성을 어느 한 면만 본 것으 로 인간성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둘째, 인간의 동물적인 성격 을 강조하면 시가 저속화될 수 있다. 셋째, 시를 쓰는 이유가 자유롭게 살기 위한 것이라고 해서 억압된 본능을 그대로 투사한다면 윤리적인 문제가 생긴다. 넷째, 장르, 표현매체, 기존 문법, 시적 주체, 이념 등을 해체한다면 시는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오해를 줄 수 있다.
이러한 대조적인 문학 이론에서에 볼 때 현재 한국시의 양상 은 대부분 전자의 이론에 근거한 시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 다. 문학(예술)은 다양성이 중요한데 이렇게 단일한 이론에만 매 여서는 발전이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래 서 좀더 자유로운 새로운 시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실 험시 또는 전위시라는 관점에서 보면 현 시점에서는 모더니즘
시(모더니즘도 그 이전 시대의 시들보다는 전위적이었지만)보다 포스트모더니
즘 시가 더 많은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보기 때문에 우리 시인 들이 이런 류의 시를 많이 쓰기를 바라고 나아가서는 이의 단 점이나 모순점을 찾아서 더 발전된 새로운 시가 나타나기를 기 대한다.
위와 같은 견해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이런 점이 새로운 시를 창작하는 출발점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포 스트모더니즘(해체이론)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철학사상도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재 상황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앞으로 나아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한국 전위시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살펴 보자.
먼저 형식적 전위시를 보면, 이승훈은 “우리시에서 <실험>이 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분은 김종길이 아닌가 한다.”(이승훈, 앞의 책, 34쪽) 고 하여 ‘실험’과 ‘전위’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전위시는 한국시에서는 1930년대 이상의 시에서 나 타났다.
해방기(1945-1948년)에는 『전위시인집』파의 “올바른 세계 인식 과 역사 판단”에 근거한 현실로의 환귀를 목표로 하는 정치적 전위와, 정치적 전위와 미적 전위를 통합하려 했던 『신시론』동 인들의 모더니즘적 전위가 있었다.
그 뒤 1950년대의 <후반기> 동인 가운데 한 분인 조향에게 서, 매우 도식적이긴 했지만 소위 <데뻬이즈망의 미학>이라는 초현실주의적 양상으로 나타나고, 그 후 김수영의 대담한 산문 성, 김춘수의 <무의미시>로 변용되면서 토착화된다.(이승훈, 앞의 책, 139쪽). 그 외 이승훈의 비대상시, 오규원의 날이미지시, 이성 복의 고백시 등으로 비교적 온건하게 이어지다가(이형권, 「시의 새로
움에 대하여」, 『애지』, 2013년 여름호, 26쪽) 1960년대로 오면 앞 시대와 다
른 실험적 요소가 나타난다. 김종길은 1960년대 전반기의 한 국시의 상황을 <하나의 실험기>라고 정의하며, 시의 좁은 폭을 넓히는 노력으로 정의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1) 어법의 혁명 2) 넌센스의 추구 3) 말의 질적 심화 4) 구문의 해체로 요약했 으며, 김열규는 60년대 한국시의 특성을 “비문법적이고, 비통 사적이며 아울러 비의미론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그리하여 한 국시는 <개방적 세미오시스semiosis>를 지향하게 된다.(이승훈, 앞의 책, 135-136쪽)고 하여 60년대 전반기의 한국 전위시에 대해 요약 한 바 있다. <현대시> 동인인 박의상이 이런 비교적 실험성이 강한 시를 썼다. 1970년대로 오면 이러한 실험성은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들고 쉬운 시나 민중시에 대한 옹호가 거세어진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 새로운 실험적 요소를 보여준다. 앞 시 대의 실험시들이 심미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면 이 시기의 실험 시들은 한결 도덕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80년대 시 들은 현실을 중요시했다.(이승훈, 앞의 책, 140쪽) 이형권은 이 때 황지 우나 박남철이 해체시를 썼다고 기술했다.(이형권, 앞의 책, 29쪽)
여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전위가 일어났는지를 살펴보자. 형식적 전위에서는 이상의 경우 - 특이한 신조어 사용, 숫자 나 부호나 도형 사용, 띄어쓰기 무시, 황지우의 요설체를 통한 해체시, 신문기사나 벽보 같은 일상적인 언어를 시의 문맥에 끌어들이기, 형태시 등과 박남철의 활자 뒤집기, 점층적(점강적) 활자 배열, 이모티콘 활용, 컴퓨터 언어의 카피. 황병승이나 김 경주의 활자 누이기, 활자에 중간선 넣기 등이 있고, 이 외에 포스트모더니즘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장르 혼성(패스튀시)도 많 이 보인다. 장르 혼성은 소설, 시나리오와 같은 다른 문학 장 르, 다큐, 만화, 영화, 드라마, 사진 등 다른 예술 혹은 비예술 장르와의 뒤섞임을 통해 이루어진다.(이형권, 앞의 책, 31쪽). 구체적 사례를 보면 1950년대 조향이 시나리오 용어들을 시에 수용한 것에서부터 비롯되어 1980년대 이후 빈도 높게 나타난다. 황 지우의 만화시나 벽보시, 이승하의 사진시, 유하의 영화시, 장 정일의 시나리오시, 김경주의 희곡시 등이 있고, 2000년대 중반의 미래파 시인들이 보여 주었던 환상 장르의 차용도 있다.(이 형권, 앞의 책, 31-32쪽). 장르 혼성의 또 다른 방식은 다른 예술 장르 의 내용을 시에 수용하는 것이다. 그 대상은 소설, 회화, 음악, 만화, 영화 등 다른 장르의 작품이 두루 해당되는데 최근 들어 서는 특히 영화 작품들이 시의 문맥으로 편입되는 사례가 빈도 높게 나타난다. 방법은 일종의 패러디에 의한 방법이다. 내용적 전위를 보면, 이상의 초현실주의적 표현, 김춘수의 무 의미시, 김수영의 일상시, 이승훈의 비대상시, 오규원의 날이 미지시, 이성복의 고백시 등은 내용이 시대를 앞서는 새로운 시로서 전위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 앞에서 언급한 해방 기의 전위시에서 『전위시인집』에 실린 시들 중에서 특히 ‘전진 하는 인민 속에 자신들을 위치시키는 것이 진정한 아방가르드 의 조건’이라고 부르짓는, 인민들과 함께하는 시의 현실을 중시 하는, 이념을 최우선으로 하는 시들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내 용적 전위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이면 또는 당대와 다른 특별 한 생각을 주제로 삼는다면 모두 전위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정리해보면 형식적 전위에는 문법의 파괴, 표현 매체의 개방,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림, 표현방법의 혁신, 시 형태의 시 각화, 시어의 확대, 표현 문자의 변형 등이 있고, 내용적 전위 에는 이념 강화, 무의식의 도입, 무의미 추구, 일상시, 비대상 시, 날이미지시, 고백시 등으로 요약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시사에서 형식적 전위(미적 전위)는 이제 거의 한계에 왔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내용적 전위(사상적, 철 학적 전위)에 대해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의 변혁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러한 변혁은 뒤집기 정신 으로 가능하다. 그것은 사상의 발전이 뒤집기의 역사이기 때문 이다.
새로운 전위시의 방향과 전망
이제 한국시에서 전위시가 더 이상 발전할 여지가 없을 듯하 다. 그러나 전위시는 어느 시대에나 있는 것이므로 새로운 시 에 대한 열망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새로운 장르 창조 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시대 환경의 변화에 따른 독자의 욕구 와 취향이 변했으며, 전달 매체가 바뀌었고, 문학의 소비 형태 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자가 생각하는 전위시 몇 가지를 제안해 본다.
형식면 : 단시(음운시, 단어시, 1행시, 2행시, 3행시), 애너그램(anagram, 語
句轉綴, 철자바꾸기), 사설시조 풍(판소리 풍), 그림시, 의미 조합시, 옴 니버스식 시. 디카시. 영상시, 비·속어, 은어, 약어, 인터넷 언 어, 사투리 등 지금까지 금기시 되었던 언어(필요하다면 외래어나 외국 어까지)를 혼성하여 사용하는 시. 디지털 문명의 메카니즘을 이
용하는 시(비선형시, 쌍방향성시, 실시간성시)
내용면 : 철학시, 연기緣起의 시. 수학적 시. 제작 방식면 : 공동창작시. 담화시(대화시)
여기서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면, 형식면의 음운시는 한국어 의 음운을 이용하여 한시나 영시처럼 운을 맞추어 쓰는 시이다. 단어시는 주제에 연관되는 또는 무관한 단어들을 어떤 질서 에 따라 조합하여 제시하거나 그 조합을 독자에게 맞겨 독자가 마음대로 조합하여 의미를 창조하게 하는 방식의 시다.
1행시와 2행시, 3행시는 이미 실험한 바 있는지 모르지만 주 제를 최대한 압축하여 압축미(긴축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3행시 에는 단시조도 포함된다. 현대는 속도의 시대이므로 긴 것은 독자들이 싫어한다.
애너그램은 정끝별 시인의 실험시인데 더 확장될 필요가 있 다.
사설시조풍 혹은 판소리풍 시는 일종의 이야기가 있는 요설 체이지만 리듬을 살리고 풍자적, 반어적, 역설적 이야기를 통 해 해학미를 살리는 시가 될 것이다. 이 또한 이미 실험된 바 있는 것 같은데 더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랩과 비슷 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림시는 시에 그림을 도입하는 시로 언어와 그림을 혼성하 여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암시하는 시로써 시인이 직접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그 그림은 소묘 또는 만화식이면 될 것이다. 의미 조합시는 의미상 연결이 안 되는 단어들을 상상력을 통 해서 연결하여 전체가 하나의 구조를 구축하는 시다.
옴니버스식 시는 하나의 주제에 여러 가지 다른 시들을 연결 하거나 하나의 소재를 여러 가지 다른 주제로 표현하는 시 형식이다. 디카시는 잘 아는 시인데 더 보편화할 필요가 있다. 독자 수 의 감소, 또는 소통 강화를 위해 사진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는 누리그물망이나 사회적 소통망을 통해서 한꺼번에 많은 독자 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다. 디카시는 5행 이내로 짧아야 하 며, 촌철살인의 충격을 주는 시다.
영상시는 음성, 문자, 음악, 영상을 시청각적으로 융합하여 동영상 시로 제작하는 것이다.
비속어, 은어 등의 시는 비어, 속어, 은어 등 모든 언어를 시 어로 채택하는 시다.
비선형시(하이퍼텍스트식시)는 시의 구성을 논리적 순차를 따르지 않고 비논리적, 비순차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쌍방향성시는 누리그물(또는 사회적 연결망)에 작품을 올릴 때 독 자의 댓글을 작품에 반영하거나 작자와 독자가 메일이나 카톡 등을 통하여 공동으로 창작하는 방식이다.
실시간성시는 방송기자가 삶의 현장을 실시간으로 보도하는 방식으로 쓰는 것이다.
다음 내용면의 철학시는 지금까지 있어온 사상과는 다른 사 상을 시의 주제로 삼는 것이다. 최신의 철학 사상은 해체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어떤 이는 60년대 이후의 우리 문학 의 경향을 포스트리얼리즘 시대 혹은 포스트모던리얼리즘 시 대라고 하고 있지만 아직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이제 서양의 철학이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동양의 지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게 세계적 현상이므로 불교나 노장사상 등 동양사상을 연구하여 이를 시에 반영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외래사상보다 동학사상 등 우리의 고유사상을 찾아서 이를 발전시키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연기의 시는 불교의 핵심사상인 연기 혹은 공사상을 시에 적 용하는 것이다.
수학적 시는 수학의 사상을 시에 형상화하는 것이다. 수학은 가장 정치한 철학 사상이기 때문이다. 수학적 기호도 도입한다. 그 외 디지털문명의 폐해를 비판하거나 페미니즘, 생태문학 등도 좋은 테마가 될 수 있다. 이미 이런 종류의 작품들이 많이 나오긴 했으나 관점을 달리하면 전위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창작시는 표현형식의 전위라기보다 제작방식의 전위에 해당한다. 두 사람 이상의 작자가 공동으로 시를 창작하는 방 식이다.
담화시는 작자와 독자의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 시를 정리 한 시다. 시를 문자언어로 보지 않고 음성언어로 보는 독특한 시관의 발로이다. 이는 구두시이며 즉흥시이고 일종의 행위문 학이다. 소통을 중요시하는 시이다.
전위시의 방법론
새로운 시(전위시, 실험시)를 창작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자유정신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정신 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다. 연기적 삶이다. 공空의 정신이다. 고 정관념에 매이지 않는 정신이다. 고정불변된 것은 없다는 생각 이다. 시는 정답이 없다는 생각이다. 선악, 미추, 성속, 이성 : 감성, 좋다 : 나쁘다, 진보 : 보수 그 어느 쪽에도 머물러서 안 된다는 생각이다.
둘째는 창조정신이다.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누구에게도 영향 받지 않겠다는 정신이다. 이 세상에 없던 시 를 쓰겠다는 정신이다. 남과 똑 같은 시를 쓰지 않겠다는 정신 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정신이다. 혁명정신이다. 셋째는 도전 정신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두 려움이 없는 정신이다.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정신이다. 새로운 시를 넘어서 새로운 장르까지도 창조하겠다 는 용기 있는 정신이다.
또한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은 대략 다음 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 중도의 눈으로 본다. 즉 선악, 미추 등의 이분법적 눈으로 보지 말고 사물을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 2. 맨눈으로 보아야 한다. 모든 관념, 이념, 지식, 감정을 떠나서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본다. 3. 뒤집어 생각한다. 모순되는 것을 아 우르는 일, 겉으로 일어난 것과 반대로 생각하는 일 등은 예술가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4. 모든 것은 고정불변이 아니라고 생 각하며 본다. 곧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 5. 모든 걸 관계의 짜 임으로 본다. 의미는 기호들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즉 상 대적이다.
마무리
시의 전위에는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형식적 전위와 내용적 전위가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전위는 배타적으로 분리되어 서는 안 되고, 서로 잘 어울려야 진정한 전위가 된다. 그 동안 우리 시의 새로움의 역사는 어느 한쪽으로 편중되어 왔다. 사 회적 리얼리즘 계열의 시는 내용의 전위에, 모더니즘 계열의 시는 형식의 전위를 지나치게 강조했다.
필자가 바라는 것은 어느 한쪽만의 새로움이 아닌 형식에 맞 는 내용, 내용에 맞는 형식의 전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 이다. 색다른 표현, 신기함만을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전위가 아니다. 시의 표현은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존재 하는 것이다.
특히 바라는 것은 내용이나 형식의 부분적인 전위를 넘어서 장르 창조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하고, 질문을 할 줄 아는 힘이 있어야 한다.
시인 강준철은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2003년 《미네르바》 봄호로 등단했으며 부산여자대학교 교수로 정년퇴임했다. 우리말글사랑행동본부, 수영구문인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문인협회, 부산한글학회 회원, 부산문인협회, 미네르바문 학회 이사로 있다. ‘시와인식’ 동인. 시집으로는 『바다의 손』, 『푸조나무가 웃었다』, 『부처님, 안테 나 위로 올라가다』 , 『나도 한번 뒤집어 볼까요?』, 『벽이 벽 너머에게』가 있으며 저서로는 『꿈 서사 문학 연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