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소설 바이블

소설 바이블

지은이 : 우슬초
출간일 : 2019-05-31
ISBN : 9791163475415
판매가 : 4,900원
포멧 : ePub
판매서점

책소개

이 책은 평생을 성경을 읽으며 연구해 온 성경학자가 지나온 역사와 앞으로 있을 역사를 성경을 근거로 소설형식을 빌어 표현한 책입니다.

물론 소설이기에 부담 없이 읽어나간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진지하게 성찰하면서 읽는다면 그냥 소설에 그칠 내용은 아니라는 것 또한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글은 과거에 그랬을 수도 있고, 현재 그러고 있을 수도 있으며, 나아가 미래에 그럴 수도 있을 개연성이 충분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저자가 일생동안 성경을 읽고 통찰한 결과를 요약해 낸 보배롭고 소중한 결과물들을 집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저자가 성경만을 기준으로 삼고 글을 썼으며, 성경을 둘러싼 관련 지식들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정통 교단에서 내세우는 교리와 다소 다른 점들도 있기에 소설의 형식을 빌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책을 접하시는 모든 분들께 더욱 큰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셔서 더 큰 은혜와 깨달음을 얻으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목차

목 차

제1장 서론
제1절 현재 나의 근황
제2절 내가 여기에 오기까지

제2장 영원세계에 계신 하나님
제1절 영원세계와 예수 그리스도
제2절 항상 현재형으로 계시는 하나님
제3절 삼위(三位)가 일체(一體)로 계시는 하나님

제3장 천지창조

제4장 범죄와 추방

제5장 후손 번식

제6장 홍수 심판

제7장 신인류(新人類)

제8장 인류(人類)를 향한 하나님의 뜻

제9장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初臨)
제1절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
제2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제3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심
제4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제5절 십자가
제6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제10장 성령강림과 초대교회
제1절 성령강림
제2절 초대교회

제11장 중세교회와 종교개혁

제12장 개신교회
제1절 사도신경
제2절 크리스마스
제3절 부활절
제4절 기도
제5절 방언
제6절 전도
제7절 좋은 신앙
제8절 생각하는 신앙
제9절 신앙성장
제10절 구원의 조건
제11절 구원의 확신
제12절 천국에 올라온 교인들, 못 올라온 교인들
제13절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본 구원
제1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 가려면
제15절 행위구원
제16절 율법의 폐지ㆍ완성
제17절 십일조
제18절 사람들이 하는 오해
제19절 성도란?

제13장 재림(再臨)과 휴거(携擧)
제1절 재림(再臨)
제2절 휴거(携擧)

제14장 우주종말(宇宙終末)
제1절 우주탄생
제2절 우주종말
제3절 우주부활

제15장 개인의 종말

제16장 천국의 위치

책리뷰

제1장 서론


제1절 현재 나의 근황

내가 이곳에 온 것은 AD 2100년이었다. 이곳에 온 후로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지금이 서력기원 몇 년인지 알지 못한다. 아무튼 이곳은 지상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세상이다. 하지만 뭐가 다른지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엄마 뱃속에 살다가 세상에 나왔을 때 그 전후(前後)가 어떻게 다른지를 기억할 수 있다면 이런 상황일까? 꽃이 핀 아름다운 산을 바라보며 동시에 그 산의 깊은 속까지 들여다 볼 수 있고, 심지어는 날아서 그 산 중턱을 통과하여 반대쪽으로 나갈 수도 있다.

누구든 보고 싶다고 생각을 하면 그 사람이 내 앞에 금방 나타난다. 어디든 가고 싶다고 생각을 하면 이미 그곳에 내가 와 있다. 그리고 상대방과 같이 있어도 말이 필요 없다. 말을 안 해도 상대방의 생각을 다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알아듣기가 매우 어렵겠지만 이곳에는 ‘순서’라는 건 있어도 ‘시간적 순서’라는 건 없다. 시간의 경과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여기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수도 새 예루살렘 성이다. 수십억 명의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

여기는 어제나 내일이라는 게 없다. 항상 오늘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부활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피곤한 것이 없으므로 잠이라는 게 없다. 잠이 없으니 밤도 없다. 항상 낮이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 어딘가를 날아가고 있다. 육신으로 세상에 살 때 봤던 아바타라는 영화에서의 장면이 기억난다. 거기서도 아름다운 산과 계곡 위를 뭔가를 타고 날아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는 뭔가를 타고 다니지는 않는다. 타지 않아도 날고 싶으면 날 수 있다. 물론 걷고 싶으면 걸을 수도 있다.

이곳에는 공간이 있되 공간이 나를 제약하지 못한다. 고체와 액체가 있되 나는 언제나 마치 그것들이 없는 것처럼 통과해서 지나갈 수 있다.

나는 옛 세상에 사는 동안 천국에 가면 저 머나먼 우주를 마음껏 날아다니리라고 항상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혼으로 천국에 있는 동안에는 그곳에서 복락의 삶을 누리기는 했지만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활체를 입은 후에는 가고 싶었던 우주가 이미 모두 불타버리고 없다. 그래서 그 꿈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금은 옛 세상에서 보았던 은하수라든지, 허블 망원경으로 보아야 했던 광활한 우주 같은 것이 없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나름대로 우주가 있긴 하다. 옛날보다 훨씬 작아서 그렇지...

그리고 지금은 망원경이 필요 없다. 부활체는 눈이 완벽하게 밝기 때문이다. 망원경으로 안 봐도 아무리 먼 곳에 있는 것이라도 다 현미경으로 보듯이 다 보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요즘 나의 근황은 이렇다. 완벽한 육체인 부활체를 입고 마음껏 날아다니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세계를 구경하며 살고 있다. 정말 매 순간 완벽한 행복을 누리며...

그리고 시간적인 순서는 아니지만 순서가 정해져 있어서 정해진 내 순서가 오면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세상에서 드렸던 어떤 예배도 여기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 웅장함과 장엄함과 엄숙함은 실로 필설(筆舌)로 형용하기가 불가능 할 정도이다.


제2절 내가 여기에 오기까지

나는 수십 년 전에 죽은 후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천국에 가서 살았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공중으로 따라 내려갔었고 내려가던 도중에 부활체를 입게 되었다. 죽었던 내 몸이 부활하여 지상에서 빛의 속도로 올라오더니 내 영혼과 결합하는 것이었다. 그 때는 내 몸에 쿵 하는 소리가 났고 나는 기절할 것 같은 충격을 느꼈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지상에 살아있던 성도들도 그때 공중으로 끌려올라왔다. 내가 보니 그들도 끌려올라오면서 부활체를 입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미 죽은 자들은 천국에서 공중으로 내려오면서 부활하였고, 지상에 살아 있던 자들은 지상에서 공중으로 올라오면서 부활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천국에 있던 성도들과 지상에 있던 성도들이 거의 동시에 부활의 몸을 입은 부활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천국에 있던 자들이 내려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지상에 있던 자들이 올라가는 것만을 생각하여 그 사건을 휴거(携擧)라고 불렀다. 휴거(携擧)라는 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중추적인 의미는 끌려올라간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공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의식을 치른 후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 의식을 사람들은 혼인잔치라고 하였다.

내려오니 우주가 변해 있었다. 지구도 변해 있었다. 우리가 알던 우주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혼인잔치 말미에 우리는 공중에서 온 우주가 불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주와 지구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었고 다른 말로 하면 부활한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부활되는 과정이었다.

그 동안에 땅도 불탔다. 땅도 역시 부활의 과정을 겪은 것이었다. 이 부활의 과정을 겪느라고 불타는 것을 사람들은 심판이라고 표현하였다.

모든 것이 불타서 사라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된 새 세상이 열렸다. 하늘과 땅이 변화된 것이다. 차원이 다른 세상 같았다. 우리는 공중에서 그리스도와 혼인잔치를 하면서 땅이 개조되기를 기다렸다가 땅이 인간의 부활체가 살 수 있도록 부활의 과정을 밟은 후에야 땅으로 내려왔었다.

이상으로 내가 최근에 겪은 일들을 대략 이야기하였다. 그러면 내가 직접 겪은 일들은 아니지만 천국에 올라와서 알게 된 내용들을 처음부터 이야기하겠다.


제2장 영원세계에 계신 하나님


제1절 영원세계와 예수 그리스도

영원세계(永遠世界)에 계시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부터 약 2,100년 전에 시공세계(時空世界)로 들어오셨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초림(初臨)이라고 불렀었다.

그는 지구에서 33년간을 사시다가 신성모독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나무 위에 올려 져서 못 박혀 죽으셨다. 그는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부활체를 입으신 채로 40일 동안을 지상에서 사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 전 다시 한 번 시공세계(時空世界)로 들어오셨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재림(再臨)이라고 불렀다. 성경에 예언된 대로 재림을 하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재림하시고 인류 역사가 끝이 났다. 재림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을 심판하시고 시공세계(時空世界)를 영원세계(永遠世界)에 편입시키셨다. 다시 말하면 시공세계(時空世界)를 질적으로 변화시켜서 기존의 영원세계(永遠世界)와 같게 만드셨다. 영원세계(永遠世界)란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면 부활세계(復活世界)였다.


제2절 항상 현재형으로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영원세계에 계셨다. 하나님은 영원세계에 계신다. 하나님은 영원세계에 계실 것이다.

이 세 문장은 모두 다 맞는 문장이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하나님이셨고 지금도 하나님이시며 미래에도 하나님이실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그렇다.

사람은 시공세계(時空世界)에 살기에 시간의 지배를 받으므로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세계(永遠世界)에 사시므로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과거, 미래가 없고 항상 현재만 있다. 하나님은 항상 현재형으로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원세계에 계신다.”라고 해야 한다. 즉 ‘계셨다.’나 ‘계실 것이다.’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인류를 향해 하나님이 던지신 첫 마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하나님은 적게 잡아도 몇 천 년 이상이 흐른 후에 다음의 말씀을 하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1:1)

그런데 위 두 말씀은 각 말씀에서 쓰인 ‘태초’라는 단어의 의미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 절의 말씀이 묘하게 짝을 이루며 인류에게 각각 장엄하게 선언을 하듯이 다가왔다.

그리고 두 말씀에서 쓰인 ‘태초’라는 단어의 의미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변할 수 없는 사실은 하나님은 창1:1의 말씀을 하셨을 때도 요1:1의 말씀을 하셨을 때도 같은 조건하에 계셨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는 하나님은 창1:1에서도 ‘계셨고’ 요1:1에서도 ‘계셨다’. 그리고 창1:1의 말씀을 하신 시점과 요1:1의 말씀을 하신 시점 사이에는 몇 천 년의 시간적 간격(gap)이 존재한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 때가 곧 그 때이다. 하나님은 영원세계에 계시기 때문이다. 영원세계란 시간과 공간 밖, 시공세계 밖에 존재하기 때문
이다.

영원세계에 하나님이 계셨다. 아니 ‘계신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기 때문에 과거형인 ‘계셨다.’가 아니라 현재형인 ‘계신다.’로 표현한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했고 그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나날이 변했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게 없다. 항상 동일하시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말3:6)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13:8)


제3절 삼위(三位)가 일체(一體)로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삼위(三位)가 일체(一體)로 계신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서도 논증이 되었다. 창1:1을 히브리어로 보면, 하나님 자신은 복수명사로 계시되어 있었으나 행위를 하실 때는 단수동사로 표현되어 있었다.

“뻬레쉬트 빠라 엘로힘 에트 핫쉬아마임 베에트 하아레츠”
태초에 창조하시니라(단수) 하나님(복수) 하늘(쌍수) 땅(단수)

즉, ‘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의 성호(聖號)는 복수명사이되 ‘창조하시니라’라는 동사는 단수동사였다. 존재 자체는 복수로 취급되셨으나 행하실 때는 단수로 취급되셨다. 그런데 다른 곳들을 보면 복수인 ‘엘로힘’은 둘도 넷도 아닌 셋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 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28:19)

그래서 삼위일체(trinity)라는 말이 생겨났던 것이다.


제3장 천지창조

영원세계에 계신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즉,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은 두 개의 하늘과 한 개의 땅을 창조하셨다. 이것 또한 성경을 통해서도 논증이 되었다.

“뻬레쉬트 빠라 엘로힘 에트 핫쉬아마임 베에트 하아레츠”
태초에 창조하시니라(단수) 하나님(복수) 하늘(쌍수) 땅(단수)

구약성경이 기록된 언어인 히브리어의 품사 중 수사(數詞)에는 단수, 복수 말고도 쌍수(雙數)라는 게 있었다.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도 아니고 두 개라는 뜻이다.

그런데 태초에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 ‘핫쉬아마임’이 쌍수(雙數)였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은 두 개였던 것이다. 그것을 보이지 않는 영적인 하늘과 보이는 하늘 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구 위의 푸른 하늘과 저 우주 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 창조된 하늘들이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에 다들 관심을 안 가져 이러한 논쟁은 의미가 없어졌다.

하여간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창조된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깊은 대양(大洋) 위에는 흑암이 가득하였다. 즉,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그 땅은 대양(大洋) 속에 있었고, 하나님께서 셋째 날에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시니 땅이 드러났다. 이것은 성경에도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은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 그러면 여기 ‘깊음’이 무엇이었을까? 여기 ‘깊음’은 대양(大洋) 즉 큰 바다를 의미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큰 바다 위에 있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수면 위에 운행하셨던 것이다. 이것 또한 성경적으로 논증이 이미 끝났었다.

첫째, 성경은 땅이 물에서 나왔다고 말씀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9-10)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벧후3:5)

요컨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그 땅은 대양(大洋) 속에 있었고(창1:2), 하나님께서 셋째 날에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시니 땅이 드러났다(창1:9-10). 그러니 땅이 물에서 나와 물에서 성립된 것이었다(벧후3:5).

둘째, 영어성경에는 창1:2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And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 and darkness was upon the 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of the waters.” (KJV)

여기 ‘darkness was upon the face of the deep’에서 ‘deep’은 보통 형용사로 쓰였던 단어였는데 여기서는 명사로 쓰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deep’은 형용사로 쓰일 때는 ‘깊은’이라는 뜻이었지만 명사로 쓰일 때는 뜻이 달라졌다. 즉 명사로 쓰일 때는 ‘대양(大洋)’이라는 뜻으로 쓰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 즉 지구는 처음에는 대양(大洋) 속에 잠겨 있다가 셋째 날에 뭍으로서 드러난 것이었다.


제4장 범죄와 추방


하나님께서는 지면의 먼지로 아담(Adam)을 만드시고는 그에게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그를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를 취하여 이브(Eve)를 만드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nd the LORD God formed man of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여호와 하나님이 지면의 먼지로 사람을 만드셨고, 그의 콧구멍 속으로 생명의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에덴 안에 동산을 창조하셨다. ‘동방의 에덴에(개역개정 창2:8)’가 아니라 ‘에덴 안에서 동쪽에(KJV)’ 동산을 창설하신 것이었다. 즉 에덴 전체가 동산이 아니라 에덴 안에 동쪽에 동산(garden)을 창설하신 것이었다.

창2:8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And the LORD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 에덴 안에서 동쪽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즉 에덴 안에 동산이 있었다.)

그러고는 지으신 아담(Adam)과 이브(Eve)를 거기에 두셨다(창2:8). 그러고 나서 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를 두시고는 생명나무 과일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은 먹는 것을 금하셨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그들은 그 과일을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계명을 어기는 죄를 범하여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성경에도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에 없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과일을 따먹었다고 해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려고 하다가 쫓겨났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히브리 관용어를 알지 못하면 해석이 안 되는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대부분 그것을 알지 못하여 과일 하나 따먹는 게 무슨 죄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었다.

나라마다 고유의 전통과 관습을 같이 해온 사람들이라야 알 수 있는 언어를 관용어라고 했는데, 내가 살았던 대한민국의 예를 들면 “발등에 불 떨어졌는데 뭐하고 있어?” 같은 말이 여기에 해당하였다.

이와 같은 관용어로서 성경에 나오는 예는 많았다. ‘선과 악’은 ‘총체, 전체, 모든’의 뜻이었다. ‘선악 간에’라는 말은 ‘무엇이든’이라는 뜻이었다.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라는 말은 ‘어떠한 해로운 행위도 하지 말고 그대로 보내라.’는 뜻이었다. ‘출입하다.’라는 말은 ‘정상적으로 사역을 감당하다. 왕성하게 일하다. 지휘하다. 다스리다.’라는 뜻이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라는 말은 ‘모든 피조물들’이라는 뜻이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전 영토’라는 뜻이었다. ‘발을 가리다’라는 말은 ‘용변을 보다’라는 뜻이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이라는 뜻이었다. ‘​열조에게로 돌아가다.’라는 말은 ‘세상을 떠나다.’라는 뜻이었다.

하여간, 급한 일이 있을 때 “발등에 불 떨어졌는데 뭐하고 있어?”라고 말하면 전통과 관습을 같이 해온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급한 상황인데 뭐하고 있어?”라고 받아들였지만, 한국어를 어설프게 배운 외국인이라면 “Oh, there is no fire on my foot.(오! 내 발등에 불 없어요.)"하고 대답하게 될 것이었다. 이런 것이 관용어였고 외국인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이런 상황이 많이 발생하여 엉뚱하게 해석을 한 경우가 많았었다.

선악을 안다는 것 또한 이러한 관용어의 범주에 속하는 내용이었는데, 히브리 관용어로 ‘선악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안다’는 뜻이었다. 즉 전지(全知)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3:5)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s, knowing good and evil.

(너희가 그것으로부터 먹는 날에 너희의 눈들이 열려져서 너희가 신들처럼 되어 선과 악을 알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전지(全知)하게 되기 위하여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 이것이 단순한 사항이 아닌 게, 전지(全知)란 하나님의 영역이고 다시 말하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자리를 탐했으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쫓아내셨고 에덴의 동산 동쪽에 케루빔들과 사방을 돌아다니는 불타는 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So he drove out the man; and he placed at the east of the garden of Eden Cherubims, and a flaming sword which turned every way,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fe."

저자소개

중앙대학교 졸업 (영어영문학)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대학원 졸업 (교육정책학)
고려신학대학원 졸업 (신학)
백석대학교 실천신학대학원 3학차 수료 (실천신학)
저서 : 성경대로 믿는 신앙(e퍼플), 평화문(e퍼플), 여의신검문(e퍼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