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 구절 중에서 잘못 해석되고 있거나 단편적으로 알고 있어서 설명이 필요한 구절들을 중심으로 해설을 하였습니다. 주옥같은 내용과 참신하고 기발한 비유를 많이 수록하였으므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중요한 내용을 발췌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화론에서는 지구의 나이를 45억 년이라고 합니다. 우라늄238의 반감기 즉 반으로 감소하는 주기는 45억 년이며, 현재 물질 중에 가장 적게 포함된 우리늄 함량은 50%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최초에 포함된 우라늄 함량이 100%였다면 그것이 50%로 줄어드는 데 걸린 기간이 45억 년이므로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최초의 함량이 100%가 아니라면 지구의 나이가 45억 년이라는 가설은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우주의 크기를 보통 137억 광년이라고 합니다. 우주의 끝까지 가는데 빛의 속도로 137억 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우주의 끝이라는 것이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가장 먼 거리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망원경의 시야 너머에 또 다른 우주가 없다는 가정 위에 성립된 가설인 것입니다. 만일 망원경의 시야 너머에 또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면 우주의 크기가 137억 광년이라는 가설도,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이라는 가설도 모두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창조된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여기 ‘깊음’이 무엇이었을까요? 여기 ‘깊음’은 대양(大洋) 즉 큰 바다였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큰 바다 위에 있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수면 위에 운행하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그 땅은 대양(大洋) 속에 잠겨 있었고, 하나님께서 셋째 날에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시니 땅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선악을 안다는 것 또한 이러한 관용어의 범주에 속하는 내용인데, 히브리 관용어로 ‘선악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즉 전지(全知)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전지(全知)하게 되기 위하여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 이것이 단순한 사항이 아닌 게, 전지(全知)란 하나님의 영역이고 다시 말하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자리를 탐했으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많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후손 아들들이며, ‘사람의 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딸들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정직하게 읽을 때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경건한 셋의 후손 아들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딸들과 결합한다고 해서 어떻게 거인(巨人)들이 탄생할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이 의인이 된 것은 이삭을 바침으로써가 아니라 자손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믿어서였습니다. 믿었기 때문에 바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이 믿음을 의로 여겨주십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순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종까지 해야 믿음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먼저 있고 난 후 그 믿음에 바탕하여 순종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행하려고 하지 말고 잘 믿으려고 해야 합니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지 말고 성령으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은 윤리 도덕과는 별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윤리 도덕에 얽매이면 안 됩니다. 성도는 성경만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윤리 도덕은 성경과 겹치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부분도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라는 작은 장난감을 만드셨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크실까요, 아니면 우주가 클까요? 당연히 하나님이 크시죠. 그런데 지구는 그 우주보다도 더 작습니다. 아니,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점에 불과하고, 더 머나먼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주에서 보면 잘 보이지도 않는 점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 잘 보이지도 않는 점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시는 방법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개미가 된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일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사람이 개미 눈앞의 지면에 손가락을 찍으면 손가락이 다인 것으로 인식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개미의 상상을 초월한 거대한 존재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람 앞에 자신을 일부 계시하시면 사람은 그게 다인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이십니다.
“금식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시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시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해 주시고 모든 멍에를 꺾어 주신다. 즉, 금식기도를 하면 모든 질병을 고쳐주신다.”
우리는 대개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 생긴 오해일뿐입니다. 앞뒤를 같이 읽으면 전혀 다른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58:6 말씀은 네가 금식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결박을 풀어주고, 네가 금식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네가 금식을 하면서 압제당하는 다른 사람을 자유하게 하고, 네가 금식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모든 멍에를 끌러주면, 네 치료가 급속히 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 내에 주객전도 현상이 있습니다. 성도가 식사 기도를 안 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뇌물에는 관대하다면 어떻습니까? 담배를 피우는 것은 정죄하면서 남에게 모질게 구는 것에는 관대하다면 어떻습니까? 술을 한잔하는 것은 정죄하면서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횡령 등에는 관대하다면 어떻습니까? 성도는 외식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줄기의 죄와 가지의 죄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근본적인 죄와 지엽적인 죄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평생을 열심히 교회에 다녀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교회에 열심히 다녀야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교회에 다녀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교회에 다녀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구원받으려고 잘 다니지 말고 구원받았으니 잘 다녀야 하겠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냇가에 가서 게를 잡은 경험이 많습니다. 강아지풀을 꺾은 후 꽃이삭을 따내고 고동을 잡아서 강아지풀 끝에 끼웁니다. 그러고는 게가 있을 법한 바위 밑 틈으로 밀어 넣습니다. 게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있을 것으로 믿고 그러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믿는 것입니다. 게가 있을 것이라고 내가 그냥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 바위 속에 있는 게가 강아지풀 끝에 매달린 고동을 뭅니다. 그래서 게가 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여기서부터는 믿어지는 것입니다. 안 믿으려고 해도 저절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회개란 방향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죄를 토설(吐說)하고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지금까지 세상을 향하여 살던 인생의 방향을 하늘을 향하여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인생관과 세계관 및 우주관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방향이 바뀌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하늘 차원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연수를 받는 중, 1m 정도 높이에서 선 채로 뒤로 넘어지면 동료들이 아래에서 받아주는 놀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생각하기에는 무척 쉬울 것 같지만 실제로 해보니 정말 어려운 경험이었습니다. 동료들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으면 절대 맡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믿으면 맡기게 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다면,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 인생을 몽땅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책임지고 맡아주십니다.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면 우리에게 안식이 찾아옵니다. 나는 쉬고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 가시면서 나의 인생을 살아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악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가져야 합니다. 악에 대하여 분노를 나타내는 것을 막말이니 상스러우니 해서는 안 됩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악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한때 석가모니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인도를 비롯한 불교국에서는 한동안 떠들썩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뼈 앞에 부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교는 멀쩡합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뼈가 발견되었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는 다 해체되고 성도는 다 해산하지 않았을까요?
어떤 사람이 사탄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갈까요? 말씀은 읽지 않고 기도만 하는 사람, 교회는 멀리하고 기도원만 다니는 사람,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은사만 추구하는 사람이 사탄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값싼 구원을 전한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절대 값싼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아들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해서 값싼 구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꿈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값비싼 구원입니까?
TV 드라마는 작가가 스토리를 미리 만들어 놓았지만, “쟤 죽여!” “쟤 살려!” 하는 시청자들의 의견에 따라 내용이 바뀌어 갑니다. 우리 인생도 TV 드라마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대체적인 방향을 정해 놓으셨지만, 성도의 기도에 따라 그 방향을 계속 변경해 가십니다.
수능시험이나 공무원 시험이나 각종 자격시험에서 가장 좋은 예상문제는 기출문제라고 합니다. 기출문제의 출제 경향에 맞추어 공부를 하면 합격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럼 신앙에는 기출문제가 없는데 우리는 어떻게 믿어야 합격하여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다. 기출문제가 없어도 성경대로 믿으면 넉넉히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바람은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분다고 합니다. 성령은 헬라어로는 ‘프뉴마’라고 하고, 히브리어로는 ‘루아흐’라고 하는데, 바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령도 바람처럼 자기를 스스로 낮추는 겸손한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창1:2)
땅에 충만하라 (창1:28)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창2:7)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창2:8)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창2:17)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3:4)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창3:15)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3-5)
죄가 너를 원하나 (창4:7)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창6:3)
하나님의 아들들 (창6:4)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창7:11)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창11:2)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15:6)
치료하는 여호와 (출15:26)
안식일을 지키라 (출20:8)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37:4)
여호와께 맡기라 (시37:5)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시95:3)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시119:71)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시145:20)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잠14:11)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전10:8)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전10:14)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사53:5)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사58:6)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단12:4)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말3:10)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마5:17)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마5:20)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6:33)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마12:28)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13:44)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마25:21, 23)
십자가에 못 박히니 (마27:38)
하늘로 올려지사 (막16:19)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눅12:20)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18:8)
스스로 조심하라 (눅21:34)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24:42-4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1:1)
거듭나지 아니하면 (요3:3)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5:28-29)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20:29)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1:5)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행1:8)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행2:2-3)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4)
너희가 회개하여 (행2:38)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행4:12)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4:17)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말씀이 네게 가까워 (롬10:8)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롬10:9)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12:11)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12:21)
십자가의 도 (고전1:18)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고전12:10)
다시 살아나사 (고전15:4)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후4:7)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후5:17)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11:14)
저주를 받은 바 되사 (갈3:13)
우리를 예정하사 (엡1:5)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엡2:5)
세월을 아끼라 (엡5:16)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골1:13)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살전4:16-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5:17)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3:15)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히3:4)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히4:10)
번성하게 하리라 (히6:14)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히9:27)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히10:26-27)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히11:16)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히13: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약1:15)
주 앞에서 낮추라 (약4:10)
너희는 안개니라 (약4:14)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벧후3:10)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니 (계21: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영원세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지구에는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현재에서 과거로는 갈 수가 없으며, 미래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가야지 단숨에 갈 수는 없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영원세계는 시간을 초월한 세계입니다. 우리의 관점으로는 하나님은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도 계시고, 미래에도 계실 것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는 그냥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영원세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세계에 계신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하나님은 두 개의 하늘과 한 개의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두 개의 하늘과 한 개의 땅을 창조하시니라”가 됩니다. 원문을 우리 말로 음역하면 이렇습니다.
“뻬레쉬트 빠라 엘로힘 에트 핫쉬아마임 베에트 하아레츠”
그리고 그 뜻을 보면 이렇습니다.
뻬레쉬트 : 태초에
빠라 : 창조하시니라(단수)
엘로힘 : 하나님(복수)
핫쉬아마임 : 하늘(쌍수)
하아레츠 : 땅(단수)
구약성경이 기록된 언어인 히브리어의 품사 중 수사(數詞)에는 단수, 복수 말고도 쌍수(雙數)라는 게 있습니다.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도 아니고 두 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태초에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 ‘핫쉬아마임’이 쌍수(雙數)입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은 두 개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이지 않는 영적인 하늘과 보이는 하늘 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지구 위의 푸른 하늘과 저 우주 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원문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삼위(三位)가 일체(一體)로 존재하신다는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빠라 : 창조하시니라(단수)
엘로힘 : 하나님(복수)
즉, ‘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의 성호(聖號)는 복수명사이되, ‘창조하시니라’라는 동사는 단수동사입니다. 존재 자체는 복수로 취급되었으나 행하실 때는 단수로 취급되었습니다. 히브리어는 명사뿐만 아니라 동사도 단수, 복수가 있는데, 주어인 하나님은 복수로 표현되었고, 동사인 ‘창조하시니라’는 단수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곳들을 보면 복수인 ‘엘로힘’은 둘도 넷도 아닌 셋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28:19)
그래서 삼위일체(trinity)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예수님께서 지구 위에 태어나신 사건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세계에 계신 창조주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개미의 자식으로 변해서 개미굴 속에서 태어난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사건입니다.
현대과학에서는 천지창조를 진화론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진화론은 가정에 기초한 가설이기 때문에 가정이 거짓이면 가설도 거짓이 됩니다.
예를 들면, 진화론에서는 지구의 나이를 45억 년이라고 합니다. 우라늄238의 반감기 즉 반으로 감소하는 주기는 45억 년이며, 현재 물질 중에 가장 적게 포함된 우리늄 함량은 50%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최초에 포함된 우라늄 함량이 100%였다면 그것이 50%로 줄어드는 데 걸린 기간이 45억 년이므로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최초의 함량이 100%가 아니라면 지구의 나이가 45억 년이라는 가설은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주의 크기를 보통 137억 광년이라고 합니다. 우주의 끝까지 가는데 빛의 속도로 137억 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우주의 끝이라는 것이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가장 먼 거리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망원경의 시야 너머에 또 다른 우주가 없다는 가정 위에 성립된 가설인 것입니다. 만일 망원경의 시야 너머에 또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면 우주의 크기가 137억 광년이라는 가설도,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이라는 가설도 모두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은 말년에는 성경을 고귀한 생명의 책으로 인정하고 매일 성경을 읽었으며, 진화론을 집대성한 자신을 ‘미숙한 젊은이’였다고 술회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해 의심을 품고 접근하였는데 진화론도 그중의 하나였을 뿐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진화론을 학문이 아니라 창조론과 적대 되는 종교처럼 신봉하는 것을 보고 제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증거 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다윈은 죽음을 앞두고 창조론을 진리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사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해본다면 진화론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태초’에 대하여는 요한복음 1:1에서 따로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창조된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여기 ‘깊음’이 무엇이었을까요? 여기 ‘깊음’은 대양(大洋) 즉 큰 바다였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큰 바다 위에 있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수면 위에 운행하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그 땅은 대양(大洋) 속에 잠겨 있었고, 하나님께서 셋째 날에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시니 땅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첫째, 성경은 땅이 물에서 나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9-10)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벧후3:5)
요컨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그 땅은 대양(大洋) 속에 잠겨 있다가(창1:2), 하나님께서 셋째 날에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시니 땅이 드러났습니다(창1:9-10). 그러니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이 되는 것입니다(벧후3:5).
둘째, 영어 성경에는 창1:2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And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 and darkness was upon the 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of the waters.” (KJV)
여기 ‘darkness was upon the face of the deep’을 살펴보겠습니다. ‘deep’은 보통 형용사로 쓰이는 단어인데 여기서는 명사로 쓰였습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deep’은 형용사로 쓰일 때는 ‘깊은’이라는 뜻이지만 명사로 쓰일 때는 그 뜻이 달라집니다. 즉 명사로 쓰일 때는 ‘대양(大洋)’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는 ‘deep’이 명사로 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 즉 지구는 처음에는 대양(大洋) 속에 잠겨 있다가 셋째 날에 뭍으로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셋째 날은 땅이 창조된 날이 아니라, 이미 창조되었던 땅이 바다와 분리된 날인 것입니다.
성경의 천지창조 기사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구와 인간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첫째, 지구는 물 70%와 돌과 흙 30%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간도 물(피) 70%와 뼈와 살 30%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둘째, 지구에는 물이 있어야 생명이 살 수 있습니다. 인간도 물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생명이 피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지구에는 공기가 있고 그 속에 산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혼(魂)이 있고 그 속에 영(靈)이 있습니다.
넷째, 지구는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없고 태양 빛을 반사하는데, 인간(성도)도 스스로는 빛을 발할 수 없고 하나님의 빛을 반사합니다.
다섯째, 지구도 인간도 물속에 있다가 물에서 탄생하였습니다. 특히 인간은 육체도 영혼도 물에서 탄생합니다. 육체는 양수(羊水) 속에서 자라다가 탄생하고, 영혼은 물과 성령으로 탄생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 느니라” (요3:5)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8)
옛날에는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호환(虎患)이라고 부르며 무서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여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바닷속에 사는 상어들도, 하늘을 나는 독수리들도, 사나운 사자들이나 호랑이들도 다스릴 수 있는 자격과 권세와 실력을 주신 것입니다. 지구의 왕으로서의 지위를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림으로써 오히려 그런 동물들에게 잡아먹히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사람으로 보였더라면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다른 짐승들과 똑같은 짐승으로 보였기 때문에 잡아먹힌 것입니다. 성경은 불신자를 짐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위 구절은 논란이 많은 구절입니다. ‘충만하라’는 단어가 원어 성경에도 영어 성경에도 대표 의미가 ‘다시 채우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채우다’라는 의미도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원어 성경이나 영어 성경대로 한다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지면에 퍼져 땅을 ‘다시’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9:1)
And God blessed Noah and his sons, an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원어 성경이나 영어 성경대로 한다면 하나님은 인류가 멀리멀리 퍼져나가 땅을 가득 채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과거에 어떤 존재들로 채워졌던 지구가 인류에 의해 다시 채워지기를(replenish) 원하신 것입니다.
만일 다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면 ‘채우다’라는 뜻으로 보통 쓰이는 ‘fill’이라는 단어 대신 굳이 ‘다시 채우다’가 대표 의미인 ‘replenish’를 썼을 리가 없기 때문에, 그냥 ‘채워지기를(fill)’ 원하신 게 아니라 ‘다시 채워지기를’ 원하셨다고 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앞에서 밝혔듯이 지구는 우리 인간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지구도 다시 채워졌듯이, 우리도 과거에 수준 낮은 믿음으로 채워졌던 나에게, 타인에게, 더 성숙 된 믿음으로 다시 채워야 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하나님께서는 지면의 먼지로 아담(Adam)을 만드시고는 그에게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nd the LORD God formed man of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여호와 하나님이 지면의 먼지로 사람을 만드셨고, 그의 콧구멍 속으로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
아담이라는 단어는 ‘사람’, ‘붉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흙’을 뜻하는 ‘아다마’에서 유래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만들어서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데 반해, 영어 성경KJV)은 먼지로 아담을 만들어서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영어 성경인 NIV에서는 먼지로 아담을 만들어서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살아 있는 존재(living being)가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조된 직후의 아담을 우리 성경은 ‘영’으로, KJV는 ‘혼’으로, NIV는 ‘존재’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이 구절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And the LORD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KJV)
“Now the LORD God had planted a garden in the east,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he had formed.” (NIV)
우리 성경은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다고 합니다. 지구 안에서 동쪽 지역에 에덴을 만드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영어 성경은 에덴 안에서 동쪽에 동산을 창설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에덴 전체가 동산이 아니라 에덴이라는 지역 안에 동산(garden)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는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아담(Adam)과 이브(Eve)를 거기에 두셨습니다(창2:8).
우리 성경을 기준으로 하면 지구 안에서 동쪽 어느 곳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만드신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 성경을 기준으로 하면 에덴 안에서 동쪽에 동산을 만드신 것으로서, 에덴이란 지구 안에 있었던 좀 특별한 지역이 아니었을까 추측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하나님은 에덴의 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를 두시고는 생명나무 과일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은 먹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영어 성경에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이브는 그 과일을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계명을 어기는 죄를 범하여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과일을 따 먹는 게 왜 그토록 큰 죄일까?”
이와 같은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 없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과일을 따 먹었다고 해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려고 하다가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히브리 관용어를 알지 못하면 해석이 안 되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대부분 그것을 알지 못하여 과일 하나 따먹은 게 무슨 죄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나라마다 고유의 전통과 관습을 같이 해온 사람들이라야 알 수 있는 말이 있는데 이것을 관용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면 “발등에 불 떨어졌는데 뭐 하고 있어?” 같은 말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은 관용어가 성경에는 많이 나옵니다. ‘선과 악’은 ‘총체’, ‘전체’, ‘모든’이라는 뜻입니다. ‘선악 간에’라는 말은 ‘무엇이든’이라는 뜻입니다.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는 말은 ‘어떠한 해로운 행위도 하지 말고 그대로 보내라’는 뜻입니다. ‘출입하다’라는 말은 ‘정상적으로 사역을 감당하다’, ‘왕성하게 일하다’, ‘지휘하다’, ‘다스리다’라는 뜻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라는 말은 ‘모든 피조물들’이라는 뜻입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전 영토’라는 뜻입니다. ‘발을 가리다’라는 말은 ‘용변을 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이라는 뜻입니다. ‘열조에게로 돌아가다’라는 말은 ‘세상을 떠나다’라는 뜻입니다.
급한 일이 있을 때 “발등에 불 떨어졌는데 뭐 하고 있어?”라고 말하면 전통과 관습을 같이 해온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급한 상황인데 뭐 하고 있어?”라고 받아들이지만, 우리 말을 어설프게 배운 외국인이라면 “Oh, there is no fire on my foot.(오! 내 발등에 불 없어요.)”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런 것이 관용어이고, 외국인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이런 상황이 많이 발생하여 엉뚱하게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입니다.
선악을 안다는 것 또한 이러한 관용어의 범주에 속하는 내용인데, 히브리 관용어로 ‘선악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즉 전지(全知)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3:5)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s, knowing good and evil.
(너희가 그것으로부터 먹는 날에 너희의 눈들이 열려져서 너희가 신들처럼 되어 선과 악을 알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담과 이브가 전지(全知)하게 되기 위하여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 이것이 단순한 사항이 아닌 게, 전지(全知)란 하나님의 영역이고 다시 말하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자리를 탐했으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쫓아내셨고 에덴의 동산 동쪽에 케루빔들과 사방을 돌아다니는 불타는 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So he drove out the man; and he placed at the east of the garden of Eden Cherubims, and a flaming sword which turned every way,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fe."
(그래서 그가 그 사람을 쫓아내었다. 그리고 에덴의 동산의 동쪽에 케루빔들을 배치하셨고, 불타는 검 한 자루가 사방을 돌아다니며 생명의 나무의 길을 지켰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을 부인하고 내가 하나님이 되어 사는 게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살면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복락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아담과 이브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았듯이, 영적으로 모든 걱정, 근심을 내가 떠안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3:4)
뱀이 이브에게 다가와서 유혹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3:1)
그러자 이브가 뱀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3:2-3)
그러자 뱀이 이브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3:4)
그런데 뱀이 한 이 말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Ye shall not surely die: (KJV)
You will not surely die, (NIV)
(너희가 반드시 죽지는 않을 것이다)
(not surely~ : 부분부정, 반드시 ~하지는 않다).
그러니까 우리 성경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로, 영어 성경은 “너희가 반드시 죽지는 않을 것이다”로 서로 표현이 다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경과 영미인(英美人)들이 읽는 성경 특히 KJV 사이에는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영미인들과 우리가 성경 내용을 서로 다르게 알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
이 말씀은 최초의 복음으로 알려진 말씀입니다.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이지요.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처녀의 몸에서 나실 메시아 예수님을 가리키고 뱀은 사탄을 가리킵니다.
영어 성경을 함께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it shall bruise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그리고 내가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또 너의 자손과 그녀의 자손 사이에 적대감이 있게 하리니,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뒤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여자의 후손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으로써 사탄에게 치명상을 입힐 것이나, 사탄은 여자의 후손의 발 뒤꿈치를 무는 정도의 상처를 입히는데 그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죽으심으로써 사탄의 무기인 사망을 철폐하여 사탄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3-5)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의 제물은 왜 받지 않으셨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양의 첫 새끼로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는데 농사지은 곡식으로 드려서 받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제사에는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 외에도 밀가루와 기름과 유향을 불태우고 떡을 구워 놓고 드리는 소제(素祭;grain offering)라는 제사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가인은 선을 행하지 않고 죄를 범하면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5-7)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요일3:12)
셋째,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고 가인은 믿음 없이 드렸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11:4)
넷째, 가인은 사탄에게 속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요일3:12)
이 말씀을 근거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의 바람직한 자세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둘째,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셋째, 사탄에게 가까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점치고, 굿하고, 사주팔자 보고, 돼지머리에 절하고, 장례식장에 가서 절하고, 사당에 가서 향 피우고 절하면서 주일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실까요?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죄는 태아 때부터 인간의 마음에 싹터 인간이 자라남에 따라 점점 더 강해진다.”
“죄는 처음에는 여자처럼 약하지만 내버려 두면 남자처럼 강해진다.”
“죄는 처음에는 거미줄처럼 가냘프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배를 잡아매는 밧줄처럼 강해진다.
”죄는 처음에는 손님처럼 겸손하다. 그러나 내버려 두면 주인을 내쫓고 주인이 된다.“
이솝우화에 보면 아라비아인이 야영을 위해 천막을 쳤는데 낙타가
“주인님, 밖이 추우니 발만이라도 천막에 넣게 해 주세요.”
하더니, 그다음에는 머리, 그다음에는 엉덩이...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밀고 들어오더니 마침내 주인을 몰아내고 천막을 다 차지했다고 합니다.
죄도 작은 죄를 범하고 회개치 않으면 큰 죄가 우리를 원합니다. 우리를 먹으려고 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죄를 지배하고 통치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근원인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4:7)
저는 가끔 가위에 눌리는 경험을 합니다. 그러면 정신은 말짱한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에서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대적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가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면 불에 달군 침핀이 기도하는 제 입에서 폭사 되어 나가고 나를 누르던 마귀가 사라지는 경험을 합니다.
가위에 눌려 마치 잠들게 하여 죽이려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 피! 예수 피! 예수 이름으로 나가!” 하고 명령하면 노파가 히죽히죽 웃다가 사라지는 경험도 하였습니다.
마귀는 개와 같습니다. 개는 우리가 도망가면 물려고 소리를 지르며 따라옵니다. 그러나 몽둥이를 들고 잡으러 쫓아가면 도망갑니다. 우리도 마귀를 피하지 말고 예수님의 보혈로 공격적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은 마귀에게 몽둥이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피를 가장 무서워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6:3)
이 구절을 한영 성경으로 비교해보면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And the LORD said, My spirit shall not always strive with man, for that he also is flesh: yet his days shall be an hundred and twenty years.”
(그리고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영이 사람과 항상 겨루지는 않을 것이니 이는 그도 또한 육체이기 때문이라 이제 앞으로 그의 날들은 120년이 될 것이라 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이때부터 인간의 수명이 120년으로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고 120년 후에 홍수가 나서 다 죽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는 영어 성경을 보면, NIV 성경은 우리 성경과 같이 표현되어 있으나, KJV 성경에는 “나의 영이 사람과 항상 겨루지는 않을 것이니”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not always가 쓰여 부분부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창6:4)
이 구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많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후손 아들들이며, ‘사람의 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딸들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정직하게 읽을 때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 네피림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는 영어 성경에는 ‘giants’ 즉 ‘거인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도 네피림은 ‘거인’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13:33)
경건한 셋의 후손 아들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딸들과 결합한다고 해서 어떻게 거인(巨人)들이 탄생할 수 있을까요?
노아 시대에는 거인들이 태어났는데 그들은 천사(angel)들이 지상의 여인들을 취하여 거기서 태어난 자들로 추측됩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은 키가 4~6m에 다다랐으며 힘도 엄청나게 강했습니다. 천사들은 이 범죄로 인하여 암흑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유1:6)
“And the angels which kept not their first estate, but left their own habitation, he hath reserved in everlasting chains under darkness unto the judgment of the great day.”
(또 그가 자신들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거주지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쇠사슬로 묶어 암흑 아래 두셨다.)
그런데 노아 홍수 이후에도 천사들이 지상의 여인들을 취하여 자식들을 낳는 일이 일어났는데 그중 성경에 기록된 바산 왕 옥은 침대가 4m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창6:4)
“There were giants in the earth in those days; and also after that, when the sons of God came in unto the daughters of men, and they bare children to them, the same became mighty men which were of old, men of renown.”
(그 시대에 땅에 거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또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그들이 그들에게 자식들을 낳았고 그들이 고대의 강한 자들, 유명한 자들이 되었다.)
“(르바임 족속의 남은 자는 바산 왕 옥뿐이었으며 그의 침상은 철 침상이라 아직도 암몬 족속의 랍바에 있지 아니하냐 그것을 사람의 보통 규빗으로 재면 그 길이가 아홉 규빗이요 너비가 네 규빗이니라)” (신3:11)
길이가 아홉 규빗이요 너비가 네 규빗이면 4m*1.8m가 됩니다.
1. 학력 : 중앙대학교(영문학), 교원대학교 교육정책대학원(교육정책학), 고려신학대학원(신학), 백석대학교 실천신학대학원(실천신학 3학차)
2. 저서 : 성경대로 믿는 신앙, 순수한 복음, 익숙한 성경 구절 바로 알기, 사도신경 하지 마라, 어린이 설교집(전3권), 소설 바이블, 회문동 영어, 평화문(平花門), 여의신검문(如意神劍門), 호왕문(虎王門), 무림며느리, 천상문(天上門), 중원무림 지하세계에 가다, 건강하게 장수하는 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