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창조에서 종말까지의 인류 역사를 조명하되, 창조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중점을 두고 기술하였다.
조직신학적 체계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죄에 빠진 인간이 자아를 알고,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 구원에 이른 후 교회 생활을 하다가 종말을 맞아 천국에 들어가는 순서로 신학적으로 서술되는 것임에 대(對)하여, 본서는 순전히 성경적으로 고찰하여 성경의 순서로 내용을 배열하였다.
즉,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의 순서가 아니라, 창조와 타락, 구원, 성령의 역사와 교회, 다시 오실 그리스도, 하나님의 나라 등의 순서로 배열하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와 인류의 타락, 구원의 준비와 구원, 새 생명(개인)과 교회의 탄생 및 성장을 위한 성령의 역사, 다시 오실 그리스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들어갈 영원한 천국의 순서로 서술하였다. 중요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요컨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그 땅은 대양(大洋) 속에 잠겨 있었고(창1:2), 하나님은 둘째 날에 그 물 가운데 ‘궁창’이라는 공간을 만드시고 이것을 하늘이라고 칭하셨다(창1:6-8). 이제 물은 일부는 궁창 위에, 일부는 지상에 남게 되었다.
그런 후 하나님께서 셋째 날에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시니 땅이 드러났다(창1:9-10). 그러니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이 되는 것이다(벧후3:5).
은혜를 받아 은혜가 충만한 성도, 그래서 곧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만 같아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펴고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매일 기도하는 성도...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살아계시는 것이 자나 깨나 매일 매 순간 느껴지고, 세상이 빨리 끝나 버렸으면 좋겠고... 그래서 빨리빨리 천국에 가고 싶고...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으리라. 얼마나 생동력 있고 얼마나 신선한 믿음인가?
그런데 그런 은혜가 많이 식어 항상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라는 말씀 앞에 엎드려 자신을 돌아보고 신앙의 옷매무새를 고쳐보지만, 아무래도 처음의 그런 은혜스러움은 좀처럼 회복되질 않는 성도가 있다. 그렇지만 그는 마음이 갈급할 때면 기도하고, 그렇다고 무슨 소나기 기도 같은 것도 하지 않는다. 생활 중에 기도하고, 교회 예배에도 빠지는 일이 없으며, 하나님의 일을 즉흥적으로 하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생활하며, 생활 중에 성령의 열매가 나타난다.
누가 더 훌륭한 성도인가? 사실 누가 더 훌륭하다고 하긴 좀 어렵다. 갓난아이와 청장년을 비교하라면 할 수 있겠는가? 예쁜 것으로 치자면야 갓난아이가 훨씬 더 예쁘겠지만, 능력으로 치자면 어른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니까 말이다.
요컨대 은혜 충만은 과일나무에 아름다운 꽃이 핀 것이다. 진해까지 가지 않더라도 벚꽃이 핀 거리거리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또 도화(桃花)가 만발한 복숭아밭은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지 않는가? 그렇지만 꽃은 보기는 좋지만 열매 없이 지면 그보다 허무한 것이 없다.
그런데 나무에서 꽃이 지고 열매가 주렁주렁 맺어 그것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보기에는 좀 투박하고 볼품이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창조주께서 그 나무를 만드신 목적은 꽃에 있지 않고 열매에 있음에랴. 열매는 화려하지는 못하지만 실속이 있다.
귀 있는 자는 무슨 말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아무리 볼품이 있고 아름답다 할지라도 오랫동안 꽃으로 남아 있어서는 곤란하다. 어서 꽃이 지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은혜 충만한 단계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단계로 신앙이 날마다 성숙 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을 그리스도에, 하와를 성도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즉, 아담이 깊이 잠든 사이에 하와가 탄생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성도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담이 잠에서 깨어난 뒤 하와와 부부가 되어 함께 살아간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성도들과 함께 살아가게 되시는 것이다.
제1장 창조와 타락
제1절 영원세계에 계신 하나님
1. 영원하신 하나님
2. 삼위일체 하나님
3. 하나님의 나라
제2절 천지 창조
1. 천지 창조
2. 인간 창조
제3절 타락
1. 뱀의 유혹
2. 인간의 범죄와 타락
3. 타락의 결과
제4절 새로운 희망
제5절 에덴에서 추방당한 인류
1. 아담과 하와
2. 가인과 아벨
3. 노아
4. 아브라함
5. 이삭
6. 야곱
7. 요셉
제2장 구원
제1절 출애굽과 구원
1. 출애굽
2. 광야 생활
3. 가나안 입성
4. 종합(적용)
제2절 구원의 의미
1. 죄에서 구원을 받는 것
2.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3.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4. 정리
제3절 두 종류의 구원
1. 잠정적 구원
2. 확정적 구원
제4절 믿음과 구원
1. 믿음의 의미
2. 믿음과 구원
3. 믿음과 성령 충만
제5절 구원의 과정
제3장 성령의 역사와 교회
제1절 성령과 선교
1. 서론
2. 성령강림
3. 성령과 선교
제2절 성령과 교회
1. 교회
2. 교회와 천국
3. 성령과 교회
4. 성령과 성도
제4장 다시 오실 그리스도
제1절 서론
1. 종말의 의미
2. 역사적 종말과 개인적 종말
제2절 그리스도의 초림
1. 초림의 사실
2. 초림의 의미
제3절 천년왕국(교회시대)
1. 천년왕국에 관한 학설들
2. 천년왕국에 관한 사견(私見)
제4절 그리스도의 재림
1. 재림의 시기
2. 재림 시 동행할 자들
3.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
제5절 요한계시록 분해
1. 서론 (계1:1-8)
2. 네 본 것 (계1:9-20)
3. 이제 있는 일
4. 장차 될 일 (계2:1-22:5)
5. 결론 (계22:6-21)
제5장 하나님의 나라
제1절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
제2절 범죄 전의 에덴동산과 지구
제3절 이스라엘
제4절 천년왕국(교회시대)
제5절 새 하늘과 새 땅
1. 새 하늘과 새 땅
2. 새 예루살렘
3. 불 못
제4절 믿음과 구원
1. 믿음의 의미
성경은 믿음으로 의를 얻으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행16:3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10)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9:30)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2:16)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엡2:8)
이와 같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이는 성령께서 성도의 마음속에 불러일으켜 주시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을 구약성경은 주로 ‘trust’로, 신약성경은 주로 ‘believe’로 표현하고 있는데, ‘trust’는 ‘believe’ 외에도 의지하는 것, 맡기는 것 등을 포함하고 있다. 나는 믿음을 ‘believe’보다는 ‘trust’로 정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럴 경우, 믿음이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과 주변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 등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2. 믿음과 구원
그러면 어떤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지적(知的)으로 알고(知), 심정적으로 믿고(情), 의지적으로 행하려고 결심(意)하는 믿음이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우리는 사람인지라 인생을 살다가 보면 죄를 범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즉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며, 죄를 범했다고 해서 믿음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 것이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죄를 범하고 싶은 생각은 많은데 이를 악물고 이것을 참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신앙인으로서 칭찬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그러나 한 단계 높은 신앙은 아예 처음부터 죄를 범하고 싶은 생각 자체가 생기지 않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처리되어 가야 한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삶(히12:4), 그리고 지은 죄를 날마다 철저히 회개하는 삶, 이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 하나님을 더 알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자(前者)보다는 후자(後者)가 신앙이 더 빨리 성숙한다. 성경이 세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구절을 보자.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벧전3:21)
그리고 우리는 ‘행함’과 ‘행위’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하겠다. ‘행위’란 율법의 행위(롬3:28)로서 구원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행함’이란 믿음 안에 있는, 믿음을 온전케 하는 행동(약2:22)이고, 내면적 믿음이 외부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이므로(롬14:23) 믿음이 없는 행함은 율법의 행위일 뿐, 우리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있다. 사람에게 믿음의 씨앗을 주셔서 완성된 구원에까지 이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이지만, 이것을 인간 쪽에서 바라보면 믿음의 씨를 주시고 싹이 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요, 그것이 성장하고 결실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날마다 이루어 가시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날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이다(빌2:12).
이것은 하나님께서 날마다 계획을 가지고 천국의 새로운 백성을 증가시키고 계시지만, 사람의 입장에서는 열심히 전도해야 하는 이치와 같다. 그렇다고 성도가 안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천국을 결코 확장 시키실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데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을 지극히 기뻐하시는 것이다.
3. 믿음과 성령 충만
그러면 믿음과 성령 충만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있다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먼저 성령 충만에 대하여 알아보자. 혹자는 성령 충만을 설명할 때 컵에 물이 가득한 상태라기보다는 물이 컵을 넘쳐흐르는 상태에 비유한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이렇게 물질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은 물질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란 하나님께서 내 속에 충만하게 와 계시는 상태이다. 그러면 성령 충만의 상태인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을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성령께서 천국의 통치권을 가지고 나의 심령나라를 얼마나 완벽하게 다스리고 계시는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성령 충만이란 성령에 의해 하늘나라의 통치권이 내 속에 온전히 행사되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심령이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천국의 통치권에 일부만 복종하고 대부분은 내 뜻대로 행한다면 그것은 성령 충만하지 못한 상태요 믿음도 적은 상태일 것이다. 반면에 나의 심령이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통치권에 완벽하게 복종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성령 충만한 상태요, 믿음이 좋은 상태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주’와 ‘믿음’은 정비례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성령의 내주 따로 있고 믿음 따로 있고 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 충만은 일시적일 수도 있고 반복적일 수도 있다. 성령 충만을 상실했다가 재충만을 받을 수도 있다. 믿음은 성령 충만 여부 및 그 정도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저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그 사람이 매 순간 믿음이 좋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 사람을 겪어보니 평균적으로 성령의 통치권에 복종하는 생활을 하는 것으로 평가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요컨대 믿음이 있다는 것은 마음 영토의 통치권을 성령께서 가지고 계시며 행사하고 계시는 상태라고 할 수 있고,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마음 영토를 전국적으로 빠짐없이 성령께서 지배하고 통치하고 계시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이 모두 성령 충만한 것은 아닌 것이다.
성령을 받은 상태는 하늘에 있던 천국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온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받은 상태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심령 속에 천국이 온전히 이루어져 기쁘고 즐거우며, 하나님의 통치권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기쁨으로 순종하는 상태를 말한다.
제5절 구원의 과정
구원의 과정은 소명, 중생, 회심, 믿음(신앙), 칭의, 성령세례, 성령의 내주, 성령 충만, 성화, 영화 등이다.
첫째,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도록 죄인을 부르시는 것을 말하며, 보통 복음전파 즉 전도가 그 방법으로 사용된다.
둘째, ‘중생’이란 ‘거듭남’이라고도 하는데, 아담의 범죄 이후 죽은 채로 태어난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참고로, 성경적으로는 죽음을 ‘분리’라고 정의한다. 즉, 육체의 죽음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이요, 영혼의 죽음은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셋째, ‘회심’이란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다. ‘회심’ ‘회개’로 번역된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방향전환’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원수의 관계에서 화목의 관계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회심의 경험 없이는 구원을 체험할 수 없다.
그러면 회개란 지은 죄를 돌이키고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적극적인, 전진하는 개념인가, 아니면 지은 죄만 돌아보며 후회하고 속죄를 비는 소극적인, 후진하는 개념인가? 이것 또한 세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다음 말씀을 적용할 수 있겠다.
“물은...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벧전3:21)
회개를 ‘방향전환’이라고 정의하였다. 즉, 세상과 죄악으로 향했던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방향전환 하는 것이 회개이다. 그러므로 죄를 낱낱이 고해바치고 용서를 비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요 부수적인 것이며, 회개의 초점, 회개의 주된 부분은 내 마음을 하나님께로 온전히 향하게 하고, 나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시73:28)
그렇지만 지은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비는 자세가 없이는 이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넷째, ‘믿음(신앙)’이란 성령이 신자의 마음속에 불러일으켜 주시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리킨다. 구약의 성도들은 오실 메시야를 믿었으며, 신약의 성도들은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다.
다섯째, ‘칭의’란 의롭다고 부르시는 것으로서, 죄를 용서하시고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의로운 자로 여겨 주시는 것이다.
여섯째, ‘성령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가 받는다. 성령이 거하시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 성령세례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행19:2)
그러므로 믿는 자는 이미 성령을 받았으며, 성령을 받지 않은 자는 아직 믿는 자가 아닌 것이다. 또한, 성령을 받으면 각양 은사를 선물로 받게 되며,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방언의 은사가 임하는 것은 아니다.
일곱째, ‘성령의 내주’란 성령께서 믿는 자 속에 들어와서 살아계시는 것을 말한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므로 성령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그 사람 속에, 그 육체를 성전으로 삼고 살아 계시는 것이다.
여덟째, ‘성령 충만’이란 신자가 성령의 충만하신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한다. 성령강림이 이 지상에 단 한 번 있었던 유일회적(唯一回的) 사건이듯이, 성령세례도 성도 개인에게 단 한 번 있는 유일회적(唯一回的) 사건이다. 반면에 성령 충만은 반복적 사건이다.
아홉째, ‘성화’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자아가 새롭게 되어 점점 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는 것이다. 즉,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늘나라에 대하여 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이승에서 살다가 저승으로 가듯이(이승, 저승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세상적인 표현을 그대로 썼다), 우리도 세상에서 살다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세상에 대하여 죽어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세상과 하나님 나라는 이승과 저승 또는 저승과 이승의 관계에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믿기 전과 믿은 후는 적어도 신분적으로는 이승과 저승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열 번째, ‘영화’는 우리의 몸이 부활하여 신령한 몸,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될 때 이뤄진다. 이것이 성도의 궁극적인 목표요 성도가 갖게 될 궁극적인 몸인 것이다.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이 세상에서 오래 살고 싶어 하고,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낫다고 하면서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건강한 몸으로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이나 모든 병든 육체를 고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은 후 부활하여 신령한 몸, 영화로운 몸을 입는 것이다.
제3장 성령의 역사와 교회
이 장에서는 성령의 역사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사도행전 전반부를 중심으로 선교가 이루어지고 교회가 형성되는 데 있어서 사도들의 역할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살피고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에 대하여도 언급할 것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오늘날 교회를 세우고 선교를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지침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성령께서는 교회부터 세우고 나서 선교하는 오늘날의 교회들처럼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성령께서는 사도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강력하게 선교하시고, 선교하여 추수한 영혼들을 양육하기 위한 방편으로 교회를 조직하였다는 것이다.
즉, 오늘날은 목사가 교회를 세워놓고 주로 그 지역만을 중심으로 전도하고 목회를 하지만, 성령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고 여러 군데 선교를 먼저 하시고 그 결과를 교회 설립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하셨다는 것이다.
제1절 성령과 선교
1. 서론
구약시대에는 선교라는 관념이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 오직 선민 이스라엘이 있었을 뿐이고 그들의 제사만이 있었을 뿐...
그러면 선교의 근거는 무엇일까? 왜 선교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시면서 하신 말씀들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선교에 대하여 얼마나 큰 열망을 갖고 계셨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하신 말씀들을 한마디로 한다면 ‘성령 받고 전도하라’는 것이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눅24:49)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1:4-5)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28:18-20)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16:15-16)
말하자면 성령을 받는 것은 명령이라기보다는 예언에 속하고, 전도하라는 것은 명령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선교를 명령하시고, 성령께서는 다이너마이트의 폭발력과 같은 능력으로 사도들이 선교할 때 도와주셨는데, 성령께서는 오늘날 교회가 선교할 때도 이와 같이 도와주시는 것이다.
사도행전 전반부에 나타난 성령은 그 역할로 볼 때 선교의 영이시다. 선교는 전적으로 성령께서 계획하시고 진행하시고 결실을 얻게 하셨다. 사도들은 일이 어떻게 진행돼 갈 것인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성령께 그저 순종할 때 기적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말하자면 성령께서 다 하셨고 사도들은 완전히 성령께 잡혀 일하는 도구와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오늘날도 그래야 한다. 사도들이 스스로 선교의 계획을 세워서 그들의 계획대로 선교를 했다면, 성령께서 하신 결과의 1/10,000이라도 달성될 수 있었을까?
물론 성령께서 다 하신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도들이 도구로 쓰임 받기를 기뻐하며 순종했던 태도와, 모든 것을 맡기고 ‘뜻대로 나를 사용하셔서 주의 뜻이 이루어 지이다.’ 하고 열심히 기도했던 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대목이다.
2. 성령강림
잘 알다시피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태어나셔서 30년 동안 평범한 생활을 하시다가, 30세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그때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3년 반 동안 복음을 전하시던 그리스도께서는 33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지상에서의 일을 다 마치신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1:4-5)
즉, 성령세례에 관한 약속을 하시고 가신 것이다. 말하자면 ‘전도하겠다고 다른 곳에 먼저 가지 말고 예루살렘에 있으라. 그러면 성령세례를 받을 것이니 성령세례를 받고 난 후에 움직이라.’는 뜻인 것이다.
또한, 이런 말씀도 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1:8)
즉, ‘지금 너희 뜻대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을 것이요, 권능을 받고 나면 너희가 좁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에까지 가서 내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받고 전도하라.’는 ‘명령’이나 ‘부탁’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게 될 것이요 권능을 받으면 전도하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120명의 무리가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쓴 지(행1:14) 열흘 만에 드디어 약속대로 성령이 임하셨다. 즉, 오순절 날 그들이 다 같이 한곳에 모여 있는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고(청각적),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이며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시각적),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행1:1-4).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대목은 이곳에 기록된 성령 충만 받는 모습은 오늘날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오늘날은 성령 받는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교회에 가득하거나(청각적),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이며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지도(시각적) 않다는 것이다. 또한, 이곳에 기록된 다른 언어들(개역 한글판에서는 ‘방언’)도 오늘날의 방언과는 달리 다른 나라의 언어였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성령 받았다’ ‘성령이 임하였다’ ‘성령세례’ ‘성령 충만’ ‘성령강림’ 등 우리가 자주 들으면서도 개념정리가 잘 안 되는 부분에 대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
먼저 성령강림과 성령세례에 대하여 알아보자.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강림은 역사적 유일회적(唯一回的) 사건이요, 성령세례는 개인적 유 일회적(唯一回的) 사건이다. 즉, 성령강림은 사도행전 2장에서 처음이요 마지막으로 있었던 사건이며, 성령세례는 성령강림 이후의 시대를 사는 성도들이 일생 동안 처음이요 마지막으로 겪는 사건인 것이다. 또한, 성령강림이란 영원세계에 계시던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이 땅 위에 오셨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으며, 성령세례는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우리 인간의 육체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는 것이다. 이 양자(兩者)는 모두 영(靈)이신 하나님이 물질세계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데 그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다음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을 받았다’ ‘성령이 임하였다’는 말의 이동(異同)에 대하여 알아보자.
이는 모두 성도 개인에게 있어서의 문제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그 일어나는 현상에 있어서 비슷하다. 성경은 적어도 ‘성령세례’와 ‘성령이 임하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행1:5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행1:8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하심으로써 ‘성령세례’와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동일시하셨다.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1: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행1:8)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남기고 승천하신 후 정말 몇 날이 못 되어, 즉 승천하신 지 열흘 만에 제자들은 모두 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4)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는데(행1:4-5) 그 말씀이 성취된 것을 보면 성령세례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고 그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행2:4).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성령께서 성도 개인에게 처음으로 임하셔서 마음속으로 들어오시는 또는 충만하게 들어오시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성령께서 마음속에 내주(來住)하시면서 성도를 다스리시기 때문에, 믿음에 확신이 생기고,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이 깨달아지는 역사가 나타나며, 교회와 예수 믿는 도리에 관한 제반 사항들이 저절로 깨달아지는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교훈하시고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다.
또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기고, 창세기의 첫 글자인 ‘태’자로부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글자인 ‘멘’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경이 티끌만큼의 의심도 없이 믿어지게 되며, 천국과 영생에 대한 확신이 생기므로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고, 마음속에 기쁨과 감사와 평강이 넘치게 된다.
한편, 성령세례와 동시에 각양 은사가 임하는 경우도 있으나, 일부 교단에서 주장하듯이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방언의 은사가 반드시 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3. 성령과 선교
성령을 선교의 영이라고 한다. 성령 충만한 교회나 성령 충만한 성도가 선교하는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제 우리는 성령께서 선교하시는 장소로 시간여행을 한 번 떠나보자.
우선 첫 번째 장소로 가 보자.
오순절 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각각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여 무식하기 그지없던 어부 등이었던 제자들의 입에서 수준 높은 외국어가 쏟아져 나오니 사람들은 우선은 그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에 놀랐고, 그다음으로는 각 나라말로 하나님의 큰일을 권능 있게 말하는 것(행2:11) 곧,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증거 하는 것(행1:22)을 듣고 놀라며 의혹하여 ‘이 어찌 된 일인가?’ 하였던 것이다.
이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15개 이상의 언어로(행2:9-11) 복음을 증거 하였고, 또 베드로가 대표로 복음을 증거 하니, 그 날에 세례를 받고 제자가 된 사람이 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행2:41).
특히 그리스도께서 잡히신 후에 세 번씩이나 주를 부인했던 나약하기만 하던 베드로의 설교가 돋보인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부활에 대한 확신을 얻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자, 이전의 그 나약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그 인생관이 180도 돌변해 버린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성령께 이끌리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인생관과 신념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변하게 될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하겠다, 우리 교회의 운명은 우리가 개척해 나가겠다고 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날 수가 없다. 나를 포기하고 인간의 뜻을 포기하는 시점(時點)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은 구약시대 때와는 달리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는 모든 악을 이길 수 있고 핍박을 당하지 않아야 하며, 교회와 성도가 핍박을 당하는 것은 비정상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가 핍박을 당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법정에 서는 박해를 당함으로써 복음이 더욱 확고해졌으며(행4:1-22), 스데반이 박해당해 순교한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욱더 빛이 나게 되었다(행6:8-60).
다음은 두 번째 장소로 가 보자.
바리새인들의 박해를 무릅쓰고 사도들이 백성들을 가르칠 때 저들이 사도들을 잡아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 믿는 자가 남자만 5,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행4:4).
오순절 성령강림 때 3,000명이 회개하고 믿었는데 불과 며칠 만에 남자만 5,000명이 믿었다고 하니 여자와 어린이까지 하면 20,000~30,000명은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인간으로 가능한 일이겠는가? 정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19:26) 하신 말씀이 실감 나는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는 세 번째 장소로 가 보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행6:7).
사울(후에 바울로 이름을 바꾸고 사도가 된 사람) 등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있게 되고 사도들 외에는 모두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다(행8:1).
이에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빌립은 사마리아로 가게 된다. 빌립이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백성들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랐으며(행8:6), 많은 사람에게서 귀신이 쫓겨나가고 중풍 병자와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행8:7).
그뿐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은 낮은 사람으로부터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 빌립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었으며(행8:10) 남녀가 다 믿고 세례를 받았으니(행8:12) 온 성이 복음화된 것이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이 사마리아로 가서 그들에게 안수하니 성령을 받게 되었다(행8:17).
다음은 네 번째 장소로 가 보자.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불문하고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다메섹(다마스커스) 회당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그런데 다메섹에 거의 다 왔을 때 홀연히 하늘에서 빛이 그를 비추니 사울은 땅에 엎드러지고 만다. 그때 사울에게 소리가 들리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린다. 이에 사울이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신다.
로마의 시민으로 태어났으며(행22:28), 베냐민 지파의 유대인이었고(빌3:5),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으며(행22:3), 종교 열이 대단했던(갈1:14, 빌3:5, 행26:4, 5)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인생관이 180도 바뀌어 버린다. 이 사건으로 유대교에서는 전쟁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장수를 빼앗겨 버렸으니... 이 일은 기독교 역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이방에 복음이 전파되리라던 성경의 예언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울에 의해 성취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교하시는 방법은 실로 절묘하다고 밖엔 표현할 길이 없다.
1. 학력 : 중앙대학교(영문학), 교원대학교 교육정책대학원(교육정책학), 고려신학대학원(신학), 백석대학교 실천신학대학원(실천신학 3학차)
2. 저서 : 익숙한 성경 구절 바로 알기(전2권), 어린이 설교집(전3권), 사도신경 강해, 이것이 바른 신앙이다, 바른 신앙을 찾아서, 기독교 신앙 입문서, 기독교 신앙상담 Q&A,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성경 한 장으로 전도하기,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지구 마지막 날 일어날 일들, 성경이 말씀하는 우주창조, 창조에서 종말까지, 주님 안에서 안식하는 신앙, 기독교 교리 단상, 소설 바이블, 성경대로 믿는 신앙, 순수한 복음, 고급 영문법 공식, 회문동 영어, 평화문(平花門), 여의신검문(如意神劍門), 호왕문(虎王門), 무림며느리, 천상문(天上門), 중원무림 지하세계에 가다, 건강하게 장수하는 비결